• 2025. 12. 27.

    by. 팔림프세스트의 연구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본래 고대 필사본에서 기존의 내용을 지운 뒤 새로운 내용을 덧씌우는 방식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기록의 삭제와 재기록이 물리적으로 중첩된 문서 형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 용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필사 기술을 넘어, 기억과 도시, 예술과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시간성과 흔적의 중첩을 설명하는 은유적 개념으로 확장되어 왔다. 문제는 이러한 은유적 사용이 팔림프세스트를 단지 ‘과거 위에 덧씌워진 현재’로 간단히 이해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 내포된 시간성과 의미 변형의 역동성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팔림프세스트를 정적인 결과로 보는 시각은 오히려 시간과 경험을 이해하는 사고의 깊이를 제한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팔림프세스트를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해석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를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관점에서 논의한다.

     

    팔림프세스트 개념은 원래부터 정적인 결과가 아닌 유동적 흔적을 뜻한다

    팔림프세스트를 문자 그대로만 이해한다면, 위에 덧씌워진 새로운 기록이 핵심이고 지워진 과거는 부차적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팔림프세스트는 본질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흔적’에 주목하는 개념이다. 지워졌지만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고, 남아 있는 과거의 잔향이 현재의 의미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팔림프세스트는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상호작용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시작과 끝이 명확한 결과물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이 겹겹이 축적되는 진행형의 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억과 정체성의 형성은 팔림프세스트적 과정 그 자체다

    인간의 기억은 선형적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기억은 반복적으로 갱신되고, 새롭게 쓰인 경험이 과거의 기억 위에 덧입혀지면서 의미가 재구성된다. 개인의 정체성 또한 단선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해석이 중첩된 결과다. 이러한 중첩적, 반복적 성격은 팔림프세스트와 매우 닮아 있다. 우리가 과거를 완전히 잊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한 ‘저장’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의미가 현재의 경험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억과 정체성의 형성은 팔림프세스트적 과정이며, 따라서 그 의미 역시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유동적인 형성 과정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도시와 문화도 팔림프세스트처럼 읽혀야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도시의 공간과 문화는 끊임없이 재개발되고 갱신되며, 과거의 흔적 위에 현재의 삶이 덧입혀진다. 이는 단순한 공간의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시간이 축적되는 방식에 대한 해석적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리와 철골로 지어진 현대적인 풍경이 전면에 드러나지만, 그 기저에는 과거의 기억과 문화가 층층이 중첩된 흔적들이 존재한다. 특히 도시 설계와 재개발 과정에서 이전 세대의 건축물이나 생활방식을 완전히 제거하는 경우에도,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서는 구조물은 일정 부분 이전의 질서를 전제하거나, 그 잔재를 암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근대화 이후 급속히 성장한 서울이나 도쿄 같은 대도시들은 산업화 시대의 도시계획 위에 스마트 도시 개념이 도입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시장의 동선 구조, 오래된 골목길의 구획, 혹은 지역 명칭 등에서 과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물리적으로는 미미할 수 있지만, 도시 정체성의 심층 구조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즉, 도시의 현재는 과거 위에 새롭게 얹힌 층위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과거를 소환하고 재해석하면서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팔림프세스트적 해석이 요구된다.

    더불어, 관광이나 도시 브랜드 전략에서도 팔림프세스트적 접근은 중요한 전략적 자원이 된다. 단순히 새로움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스토리텔링은 방문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따라서 도시와 문화를 이해할 때는, 단순히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결과물만을 해석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시간이 겹겹이 쌓인 구조물로써의 도시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은 도시를 단순한 공간이 아닌 기억과 의미의 집합체로 바라보게 하며, 그 진면목에 다가가는 유효한 해석적 도구가 된다.

     

    팔림프세스트적 예술은 ‘완성’을 거부하고 열린 해석을 지향한다

    문학, 미술, 영화 등 다양한 현대 예술 형식은 더 이상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폐쇄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해석의 여지를 의도적으로 남겨두며, 관객이나 독자의 참여를 통해 작품의 의미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구조를 선호한다. 이런 열린 구조는 특히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 철학에서 강조되어 왔으며, 이들 사조에서는 팔림프세스트 개념을 하나의 핵심적 해석 틀로 차용한다. 이 맥락에서 텍스트는 고정된 의미의 그릇이 아니라, 무수한 해석이 겹겹이 쌓이고 또다시 지워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 속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에 가깝다.

    현대 예술은 종종 자신의 형식과 주제를 반복적으로 변형하며 스스로를 재해석한다. 예를 들어, 컨셉추얼 아트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는 특정한 메시지 전달보다는 관객의 반응과 맥락에 따라 작품이 달리 해석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때 작품은 작가의 의도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경험이 덧씌워지며 비로소 살아 있는 팔림프세스트적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문학의 경우에도, 독자는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적극적인 해석자로 간주되며, 이로 인해 작품은 하나의 '완성된 의미'가 아니라 **다층적인 해석의 장(場)**으로 기능하게 된다.

    더불어, 예술사 전반을 살펴보면 동일한 주제나 신화를 여러 시대와 작가가 반복해서 변형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는 과거 작품을 지우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의미 위에 새로운 문맥을 덧씌우는 팔림프세스트적 접근이자 예술의 핵심 동력 중 하나다. 이는 창작이라는 행위가 과거를 배제하는 파괴적 혁신이 아니라, 과거와의 대화 속에서 의미를 증식시키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팔림프세스트적 예술은 결과로써의 메시지보다 과정으로서의 감상과 해석을 중시하며, 정적인 완성보다 동적인 열린 구조를 통해 예술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이러한 예술적 태도는 예술 작품을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대상이 아닌, 끝없이 재구성될 수 있는 문화적 실험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야말로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

     

    철학적 존재론은 팔림프세스트적 관점 없이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할 때 종종 ‘무엇이 되었다’는 완성된 결과를 중심으로 존재를 규정한다. 그러나 현대 철학, 특히 들뢰즈, 데리다 같은 사상가들은 존재를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관계적이고 과정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존재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해체되며, 과거의 의미가 현재의 문맥에 따라 재구성되는 역동적인 흐름이다. 이때 팔림프세스트는 존재론적 사유의 핵심 도구가 된다. 존재는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수많은 흔적과 의미가 교차하는 장(場)이다. 팔림프세스트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유 방식인 것이다.

    팔림프세스트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

    팔림프세스트는 삶의 방식이며 끝나지 않는 사유의 공간이다

    팔림프세스트는 더 이상 과거의 잔재나 단순한 기록 방식이 아니다. 이 개념은 기억, 도시, 예술, 철학 등 삶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해석의 틀이다. 팔림프세스트를 결과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중층적 구조를 놓치게 된다. 이 글에서 설명했듯이, 팔림프세스트는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덧입혀지는 것이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팔림프세스트는 하나의 개념을 넘어 존재와 삶을 해석하는 유효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