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1. 3.

    by. 팔림프세스트의 연구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삭제와 덧쓰기의 흔적이 공존하는 다층적 기록 구조로서, 한 표면에 서로 다른 시기의 텍스트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형태를 띤다. 이러한 기록 구조를 해석하는 과정은 단순히 지워진 글자를 ‘복원’하는 기술적 작업을 넘어, 텍스트 간의 층위를 구분하고, 삭제의 의도와 서술의 연속성을 판별하는 복합적인 판독 활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높은 정확성을 전제로 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오류 가능성의 조건들을 내포한다. 문자의 물리적 손상, 삭제 방식의 다양성, 시각화 기술의 왜곡, 알고리즘 판독의 오판단, 육안 관찰자의 해석 오류 등은 서로 독립적으로 또는 상호 영향을 주며 판독의 정확성을 저해하는 복합 요인으로 작동한다. 이 글에서는 팔림프세스트 판독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여섯 가지 조건을 중심으로, 그 원인과 해석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삭제 흔적: 정보의 잔존 여부보다 분포 방식이 중요해지는 경우

    삭제된 텍스트는 종종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제거된 상태로 남는다. 이러한 불완전한 삭제 흔적은 잉크의 농도, 필기 압력, 표면의 손상 상태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특정 부분은 명확히 드러나고 다른 부분은 완전히 소실되는 비균질적 분포를 보인다. 문제는 이로 인해 해석자가 잔존된 일부 정보에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불완전한 흔적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 단어의 첫 글자만 남아 있는 경우, 전체 단어를 특정 방향으로 추정하는 과정에서 선입견이나 전형적 용례에 따른 오판단이 개입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단순 시각적 문제를 넘어서, 기억된 텍스트 구조나 언어적 직관이 판독을 왜곡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삭제 방식의 다양성: 물리적·화학적 제거 방법의 흔적 차이

    팔림프세스트의 삭제는 필사자가 사용한 도구나 시대적 기술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긁어내기(scraping), 문지르기(rubbing), 화학 용액을 이용한 세척 등은 각각 다른 유형의 표면 손상을 유발하며, 시각적 잔여 정보의 형태 또한 다르게 나타난다. 이때 판독자는 흔적의 특성을 오인하거나, 삭제된 방식의 물리적 결과를 해석 근거로 삼을 때 오류에 직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적 세척은 잉크 자체는 제거되었더라도 잉크에 포함된 금속 성분이나 산화 반응이 남아 있어, 장비 판독에서 의도하지 않은 패턴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제거 행위 자체가 새로운 왜곡 신호를 생성하는 경우, 삭제와 흔적의 관계를 단선적으로 이해할 경우 오류가 발생한다.

     

    장비 판독에서의 반사 오류: 시각화 기술의 강화가 해석 왜곡으로 이어지는 조건

    다중 스펙트럼 이미징(MSI)이나 적외선 촬영(IR)을 활용한 시각화 기술은 지워진 텍스트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지만, 때로는 과도한 대비 조절, 필터링 오류, 빛 반사 왜곡 등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실제 기록 구조를 왜곡할 수 있다. 이는 특히 고대 양피지나 중세 종이처럼 표면 질감이 불균일한 자료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다.

    예를 들어 자외선 촬영에서 표면의 반사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문자의 획이 뭉개지거나 실제보다 넓게 인식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이미지 보정 과정에서 비문자적 흔적—긁힘, 오염, 곰팡이 자국 등—이 문자로 오인식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때 해석자는 ‘기술적으로 생성된 오류’를 실제 기록의 일부로 오해하게 되어 의미 왜곡이 구조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OCR 및 알고리즘 기반 판독의 한계: 규칙 기반 인식에서 벗어난 문자 구조

    OCR(광학 문자 인식)은 반복 가능한 구조를 가진 문자 시스템에 최적화된 도구이지만, 팔림프세스트처럼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문자 흔적이 남아 있는 환경에서는 인식 정확도가 급감한다. 특히 비정형 서체, 개별 필사자의 손글씨, 문자의 왜곡된 방향 등이 존재하는 경우, 기계적 인식은 형식적 유사성만을 근거로 부정확한 결과를 출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의 윗부분이 삭제된 상태에서 ‘u’로 잘못 인식되거나, ‘e’의 아래 곡선이 소실된 경우 ‘c’로 처리되는 식의 오류가 빈번하다. 문제는 이러한 오인식이 전체 단어, 문장, 나아가 문서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2차 해석의 왜곡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기계 판독 결과는 검증과 인간 판독의 보완이 반드시 필요한 가설적 정보층으로 다뤄져야 한다.

     

    육안 판독자의 전제 개입: 경험 기반 추론의 이중성

    육안 판독자는 시각적 단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 역사적 지식, 언어 직관, 필사 경험 등 풍부한 배경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비보다 높은 유연성을 가진다. 그러나 바로 이 경험이 편향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특히 필사자나 시대에 대한 고정관념, 특정 문체에 대한 익숙함이 판독에 영향을 미칠 경우, 무의식적 오류가 정답처럼 인식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예컨대 자주 등장하는 종교문구나 행정 어구를 판독자가 ‘기억’하고 있을 경우, 해당 문구의 일부분만 남아 있어도 나머지를 자동적으로 보완하여 판독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동 보완은 실제 텍스트의 내용과 불일치할 수 있으며, 원문이 삭제되어야 했던 이유나 편집자의 의도를 오히려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팔림프세스트 판독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조건

    겹쳐진 텍스트 간 상호 간섭: 중첩 구조 해석에서 발생하는 의미 혼합

    팔림프세스트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또 하나의 주요 조건은 두 개 이상의 텍스트가 겹쳐 있는 상태에서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경우다. 이때 상위 텍스트의 획 일부가 하위 텍스트와 겹쳐지면서, 두 층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문자의 형태가 왜곡되기 쉽다. 특히 동일한 필기도구나 유사한 획의 리듬으로 작성된 경우, 문자 단위의 식별이 어려워지고 해석의 혼선이 발생한다.

    이러한 간섭 구조는 단순한 문자 오독뿐 아니라, 서사나 정보 체계 자체의 혼합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잘못된 층위 인식은 결국 문서 전체의 역사적 맥락을 왜곡할 가능성을 높인다. 따라서 중첩된 구조에서 오류를 방지하려면, 획 단위의 분석뿐 아니라 텍스트 간의 구조적 대비가 병행되어야 한다.

     

    정확한 판독은 단일 기술이 아니라, 오류 인식 체계의 설계에서 출발한다

    팔림프세스트의 판독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단일 기술적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문서의 물리적 손상, 삭제 기법의 차이, 기록 매체의 변화, 장비 해상도의 한계, 데이터 추출 알고리즘의 편향성, 판독자의 경험 개입 등은 각각 서로 다른 층위에서 오류 가능성을 생산한다. 더욱이 이 오류들은 고립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특정한 해석 상황에서 중첩·상호 작용하며 복합적인 판독 왜곡을 유발한다. 이와 같은 구조적 오류 가능성은 단순한 해석 실패가 아니라, 기록 기술과 해석 환경 자체에 내재한 한계 조건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더 정밀한 장비를 도입하거나, 더 강력한 알고리즘을 적용하는 접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류 발생 가능성을 미리 구조적으로 인식하고, 해석자가 이를 해석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점검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메타 인식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비 판독 결과를 단독의 '객관적 정보'로 취급하기보다는, 해석 가능한 가설로 간주한 후 인간 판독자의 문맥적 비판과 병렬해 검증하는 이중적 평가 구조가 필요하다. 오류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오류가, 어떤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를 추적 가능하게 만드는 설계가 핵심이다.

    더불어 팔림프세스트는 그 자체가 해석의 대상인 동시에, 해석 실패의 과정을 기록하는 메타 기록 구조이기도 하다. 하나의 문서 안에 포함된 삭제 흔적, 덧쓰기 시도, 복원 흔적, 판독자의 주석, 기술적 분석 결과들은 모두 특정한 시대의 해석 조건과 판단 기준을 반영하며, 그 과정에서 ‘무엇이 드러났고, 무엇이 드러나지 않았는가’를 통해 해석의 한계까지 가시화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팔림프세스트의 판독은 과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해석 조건과 기술적 판단의 지형을 반영하는 자기반성적 기록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정확한 해독은 어떤 도구나 한 가지 기술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석 주체가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의 성능과 한계, 사용하는 기술의 조건과 편향, 그리고 자신의 직관과 판단이 개입되는 지점을 자각하고 있는지 여부가 판독의 신뢰성을 결정한다. 이는 결국 해석 주체가 단순한 정보 수집자가 아닌, 기록 구조의 불완전성과 오류 가능성을 함께 아카이빙 하는 메타 비평적 실천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팔림프세스트뿐 아니라, 향후 디지털 복원 환경이나 대규모 텍스트 아카이브에서도 적용 가능한 핵심 원칙이 된다. 기록의 진실성은 기록 그 자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이 어떻게 복원되었는가, 어떤 오류가 인정되었는가, 어떤 해석이 채택되었는가라는 질문들을 함께 묻는 구조 안에서 형성된다. 이때 정확성은 '실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인식하고 기록하며 판단 과정에서 반영할 수 있는 설계 능력을 뜻한다.

    결국 팔림프세스트의 판독은 단일한 해답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다층적 흔적과 불완전한 단서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들을 ‘함께 아카이빙’하는 복합적 해석 구조를 세우는 작업이다. 기술과 인간 판단이 공존하는 이 실천은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조건화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적 경험이자 윤리적 설계 행위다. 정확한 판독은 도구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도구를 다루는 판단의 구조에서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