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12. 29.

    by. 팔림프세스트의 연구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기록의 반복과 삭제, 그리고 덧씌움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매체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오래된 문서 위에 새로운 텍스트를 덧씌운 물리적 흔적을 가리키지만, 이 구조가 형성되는 배경에는 단순한 기록 매체의 재활용을 넘는 문화적·사회적 요인의 작용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필사 관행의 변화는 팔림프세스트의 빈도와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필사가 단순한 복사 작업을 넘어 지식 유통과 권력의 통로로 작동하던 시대에, 그 관행의 변화는 기록의 방식뿐 아니라 기록의 수명과 위계, 삭제의 필요성까지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이 글에서는 다양한 시대의 필사 문화가 어떻게 팔림프세스트의 빈도와 구조를 변화시켰는지 분석하고, 기록을 둘러싼 인간 행위의 층위적 성격을 고찰한다.

     

    집단적 필사 체계의 출현과 팔림프세스트 초기화의 배경

    초기 팔림프세스트가 가장 활발하게 제작된 시기에는 대부분의 필사 작업이 수도원이나 종교기관 내에서 집단적이고 반복적인 양식으로 수행되었다. 특히 중세 초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필사실(scriptorium)이 설치되어 수도사들이 조직적으로 성경과 신학서를 복사하는 문화가 정착되었는데, 이처럼 체계화된 필사 환경은 오히려 팔림프세스트의 빈도를 높이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 필사는 창작이라기보다는 ‘보존을 위한 재현’의 개념에 가까웠고,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기보다 기존 지식을 반복 전승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종교적 권위의 변화, 교리의 수정, 제도적 정비와 같은 이슈가 발생하면, 이전 내용이 빠르게 폐기되고 같은 매체 위에 새로운 권위가 덧입혀졌다. 따라서 필사의 조직화는, 내용의 권위에 따라 기록이 선택적으로 지워지고 갱신되는 ‘위계적 덧쓰기’를 가능하게 만든 문화적 조건이기도 했다.

     

    필사자의 주체성이 낮았던 시기: 텍스트의 가변성과 삭제 가능성의 관계

    팔림프세스트가 많이 발생한 또 다른 배경은, 필사자 개인의 창작 권한이 낮았던 시기와 관련이 있다. 즉, 필사가 단순 노동으로 간주되었던 시대에는 기록의 고유성보다 실용성이 더 중시되었고, 이는 곧 삭제의 용이성으로 이어졌다.

    당시 필사자는 텍스트에 자신의 해석이나 주석을 삽입하기보다, 기존의 텍스트를 충실히 재현하는 데 집중했으며, 따라서 동일한 내용의 복사본이 반복적으로 생산되었다. 이런 복제 구조에서는 개별 문서 하나의 독립적 가치가 낮게 평가되었기 때문에, 기존 문서를 지우고 새로운 내용을 덧씌우는 팔림프세스트 제작이 상대적으로 더 빈번했다.

    필사 관행의 변화가 팔림프세스트 빈도를 바꾼 방식

    이러한 관행은 팔림프세스트가 단지 물질적 자원의 재활용뿐 아니라, 텍스트에 부여된 권위와 유통 방식에 따라 얼마나 ‘지워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는가에 달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석 필사와 여백 사용의 확대가 가져온 층위 인식의 변화

    중세 후기로 갈수록 필사자들은 단순한 복사자에서 해석자 또는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필사본 여백에 다양한 주석, 반론, 보완 기록이 병기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기록물 자체가 단일한 텍스트가 아닌, 다층적인 구조를 가진 매체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주석 필사 문화는 팔림프세스트의 빈도를 직접적으로 줄이지는 않았지만, 기록의 층위에 대한 자각적 인식을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즉, 기존 텍스트를 완전히 지워버리기보다, 덧붙이고, 구분하고, 병기하는 방식으로 층위를 다루는 문화가 점차 정착된 것이다.

    이는 ‘덧씌우기’를 ‘삭제 후 대체’가 아닌 ‘병존적 해석’으로 전환시키는 문화적 흐름으로, 팔림프세스트의 구조가 단순한 위계적 재기록에서, 공존적·비판적 기록 구조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인쇄술의 확산이 촉발한 필사의 위축과 팔림프세스트의 구조적 종결

    15세기 중반 이후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보급되면서 필사 문화는 급격히 쇠퇴했고, 이와 동시에 팔림프세스트 역시 빠르게 감소세를 보이게 된다. 인쇄 기술의 등장은 문서 생산의 표준화, 대량화, 비용 절감 등을 가능하게 했으며, 개별 문서의 수정보다는 새로운 인쇄물의 제작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기록문화가 전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록의 수정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필사 시기에는 기존 문서에 물리적으로 덧씌우거나 일부를 지워 수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인쇄 이후에는 텍스트를 완전히 새롭게 제작함으로써 수정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인쇄술의 보급은 단순히 기술적 진보를 넘어, 기록의 수정 및 보존 방식 자체를 바꾸어 팔림프세스트의 생성 구조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필사자의 전문화와 기록 보존 의식의 성장

    16세기 이후부터는 필사자의 지위와 역할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법률문서, 외교문서, 과학기록 등 특정 분야에서는 필사자의 전문성이 강조되었고, 이와 함께 기록의 원본성, 진본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확산되었다.

    이는 곧, 문서를 쉽게 지우고 재기록하는 팔림프세스트 방식이 공적 기록물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으로 이어졌으며, 기록 보존이라는 개념이 문화적 관행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필사 기술의 정밀성과 함께 기록물의 보관과 정리 체계도 발전하였으며, 문서가 단지 정보의 수단이 아니라 역사적 증거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팔림프세스트를 허용하지 않는 아카이브 중심의 기록 문화를 형성하며, 필사 관행의 근본적 전환을 만들어냈다.

     

    현대적 필사의 변형: 디지털 필사와 팔림프세스트의 새로운 양상

    오늘날에는 손으로 쓰는 필사가 아닌, 디지털 환경에서의 기록과 편집이 새로운 형태의 ‘필사 행위’로 대체되고 있다. 워드프로세서, 클라우드 문서, 자동 저장 시스템 등은 기록의 실시간 생성과 수정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러한 기능들은 오히려 지속적인 수정과 덮어쓰기를 일상화함으로써 디지털 팔림프세스트의 형태를 증가시키고 있다.

    예컨대 워드의 ‘버전 히스토리’나 구글 문서의 ‘변경 기록’은 과거의 삭제된 내용이 실제로는 층위 형태로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디지털적 팔림프세스트에 해당한다. 이는 현대의 필사 관행이 물리적 기록에서 디지털 편집으로 전환되면서, 기록의 삭제 가능성과 보존 가능성이 동시에 확장되는 이중적 구조를 만들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필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형태가 바뀌면서 팔림프세스트의 개념도 비물질적 층위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록의 본질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는 새로운 문명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필사의 전환은 기록의 구조를 바꾸고, 팔림프세스트의 성격을 다시 정의했다

    팔림프세스트의 빈도와 구조는 단지 기록 매체의 물리적 특성이나 시대적 자원 상태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양피지와 같은 고가의 재료 사용이나, 기록을 지워 재활용해야 했던 물질적 제약은 팔림프세스트의 형성에 중요한 물리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는, 기록 행위의 주체인 필사자, 그리고 그들이 속한 사회와 문화의 기록에 대한 인식과 관행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 팔림프세스트의 성립은 단순한 ‘무엇에 기록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기록되었고, 그 기록이 어떤 태도로 다루어졌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필사 관행이 집단적이고, 단순 복제 중심이었던 시기에는 문서 하나하나의 고유성이 낮게 평가되었고, 이는 기존 텍스트를 지우고 새로운 텍스트를 덧입히는 팔림프세스트의 생성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이 시기의 기록은 특정한 메시지를 남기는 목적보다, 지속적인 전달과 반복적 전승이라는 기능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보 자체보다는 복제 가능성과 수용자 확보가 더 큰 가치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그 시대의 팔림프세스트는 ‘삭제된 과거’라기보다는, ‘임시적인 기록 위에 임시적인 권위가 덧씌워지는 문화적 반복’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필사의 목적은 점차 변화했다. 필사가 단순한 복제에서 벗어나, 해석의 개입이 가능한 행위로 전환되면서 기록 자체에 대한 존중과 보존의식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기록의 처리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전에는 지우고 덧씌우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면, 점차 주석을 달고, 여백에 설명을 추가하거나, 기존 텍스트와 새로운 텍스트를 병기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이 변화는 단지 팔림프세스트의 물리적 빈도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기록의 층위 구조를 병존적으로 인식하는 문화적 감각을 확대시켰다. 다시 말해, 기록은 제거와 대체의 대상에서, 해석과 대화의 대상으로 위치가 이동한 것이다.

    기술의 발전 역시 이 변화에 가속을 더했다. 인쇄술의 등장 이후에는 수정이 필요할 때마다 문서를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판본을 인쇄하여 교체하는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팔림프세스트와 같은 삭제-재기록의 문화는 구조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나아가 20세기 이후에는 문서 관리와 보존에 대한 제도적 기준이 확립되면서, 원문 기록의 훼손 자체가 기록 윤리나 법적 책임과 연결되는 영역으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팔림프세스트는 더 이상 실용적인 기록 행위가 아닌, 특수한 역사적 흔적 또는 예외적인 개입의 결과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팔림프세스트는 사라지지 않았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팔림프세스트가 생성되고 있으며, 그것은 삭제, 수정, 복원 가능성이 기술적으로 뒤얽힌 복합적 기록 구조로 나타난다. 워드 프로세서의 히스토리 기능, 클라우드 저장소의 변경 기록, 온라인 문서의 자동 백업은 모두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삭제된 텍스트가 보존되고, 복구 가능하며, 추적 가능한 ‘비가시적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비물질적 팔림프세스트는 과거와는 다르게 기록의 흔적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해석 환경을 구성하게 만든다. 이는 기록과 삭제, 보존과 유실 사이의 경계가 기술에 의해 확장되고 재정의되는 시대적 조건을 보여준다.

    결국 필사 관행의 변화는 팔림프세스트의 생성 조건을 구조적으로 변화시켰고, 그에 따라 팔림프세스트의 성격 역시 전면적으로 재정의되었다. 더 이상 팔림프세스트는 단지 과거 위에 쓰인 현재가 아니다. 그것은 기록을 둘러싼 문화적 태도, 기술적 환경, 사회적 윤리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다층적인 결과물이며, 그 성립 배경에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에 대한 집단적 판단과 실천이 작용한다. 필사가 바뀌었다는 것은, 곧 기록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다루는 사회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팔림프세스트는 그 변화의 잔재이자 증거로 기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