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12. 29.

    by. 팔림프세스트의 연구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기록 위에 또 다른 기록이 덧씌워진 흔적을 의미하며, 이는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만 형성된다. 구체적으로는 기록 매체의 재사용 가능성, 삭제의 필요성, 자원의 희소성, 권력의 개입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기록 환경에서는 이러한 팔림프세스트가 거의 또는 전혀 발생하지 않으며, 이는 단순히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록을 남기는 방식, 그에 대한 사회적 태도, 기술 시스템, 보존 인식의 작동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팔림프세스트가 형성되지 않는 기록 환경의 특징을 다층적으로 분석하며, 지워 쓰는 구조가 필요하지 않은 조건, 그리고 삭제보다 축적을 선택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이는 팔림프세스트가 없는 공간이 결코 기록의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 기록의 총체적 구조가 달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석 지점이기도 하다.

     

    기록 매체의 대량 생산성과 저비용 구조

    팔림프세스트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기록 매체의 풍족함과 저렴함이다. 기록을 위한 물리적 자원이 희소하지 않을 경우, 기존 자료를 굳이 지우고 재사용할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특히 종이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이후, 기록은 점점 소비 가능한 일회성 자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는 과거처럼 기록 위에 다시 기록하는 방식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근대 이후 산업화된 인쇄 환경에서는 종이와 잉크의 단가가 급격히 낮아졌고, 문서 제작에 드는 시간과 인건비도 감소했다. 이로 인해 기록을 삭제하고 덧쓰기보다는, 새로운 문서를 아예 다시 작성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선택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팔림프세스트라는 구조 자체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타당하지 않게 되며, 기록은 누적되고 축적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보존 중심의 기록 문화와 아카이브 체계의 정착

    팔림프세스트가 형성되지 않는 두 번째 조건은, 삭제보다 보존을 우선하는 기록 문화다. 이는 단순한 기술 문제를 넘어, 기록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행정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특정한 사회나 제도는 기록을 잠정적인 정보가 아니라 장기적인 증거 또는 후대를 위한 유산으로 간주하며, 이런 문화에서는 기존 기록을 삭제하거나 재사용하는 행위가 오히려 금기시되거나 회피된다.

    근대 관료제와 함께 등장한 문서 관리법, 공문서 보존 기한, 사료 편찬 제도 등은 모두 기록을 축적 가능한 자산으로 간주하는 체계의 일부다. 이 경우, 기존 기록은 새로운 기록의 기반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지워지거나 대체되는 일은 드물다. 즉, 팔림프세스트의 부재는 단지 행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지 않도록 설계된 구조’의 산물이다.

     

    디지털 복제 환경의 확산과 수정의 비파괴적 처리 방식

    디지털 시대의 기록 환경은 팔림프세스트가 물리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문서는 수정과 저장이 가능하면서도, 원본 데이터가 유지된 채 복제본을 생성할 수 있는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더라도 기존 정보를 삭제하지 않고 별도의 버전으로 보관하는 것이 시스템 설계의 전제가 된다.

    예를 들어, 구글 문서나 클라우드 기반 협업 도구는 모든 편집 기록을 자동 저장하며, 사용자가 언제든지 과거 버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팔림프세스트와 같은 물리적 삭제-재기록 구조를 불필요하게 만들며, 기록의 시간성을 ‘수정의 누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을 정착시킨다. 이 환경에서는 ‘덧씌우기’보다 ‘기록의 동시성’을 유지하는 것이 기술적 기본값이기 때문에, 팔림프세스트가 발생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가 된다.

     

    법적·윤리적 제도에 기반한 기록물 훼손 금지

    현대의 많은 제도권 기록 환경에서는, 기존 문서의 삭제나 수정, 훼손 자체가 법적 또는 윤리적 문제로 간주된다. 특히 공공기관, 법원, 의료기관, 교육기관 등에서는 원본 기록의 온전성(integrity)이 곧 기록의 신뢰성(reliability)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여겨지기 때문에, 팔림프세스트와 같은 덧쓰기 구조가 제도적으로 차단된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는 진료기록을 수정할 경우 별도 이력으로 관리해야 하며, 원본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행정기관 역시 문서 수정이나 파기를 위해서는 공식적인 절차와 승인을 거쳐야 하며, 그 이력이 전산으로 남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기록의 삭제나 덮어쓰기가 의심 또는 위조의 행위로 간주되며, 이로 인해 팔림프세스트 구조는 제도적 수준에서 봉쇄된다.

    팔림프세스트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기록 환경의 특징

    다매체 병렬 기록 환경과 선택적 저장 전략

    기록 기술의 발전은 한 사건이나 정보를 동시에 여러 매체에 병렬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예컨대 종이 문서, 음성 녹음, 영상 촬영, 디지털 로그 등 다양한 형태의 매체가 하나의 정보 단위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존함으로써, 기록이 단일 매체 위에서 반복되거나 갱신될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다매체 병렬 구조에서는 기록의 변형이 아니라, 기록의 다양성과 상호 보완성이 우선시 되며, 팔림프세스트와 같은 덧씌움 행위는 기술적으로나 실용적으로 크게 필요하지 않다. 더불어 정보 저장 공간이 클라우드, 서버 팜, 분산 저장소 등을 통해 확장 가능하고 유동적인 자원이 되었기 때문에, 이전 기록을 지우고 다시 쓰는 압력도 자연스럽게 감소하게 된다. 기록은 삭제보다는 분산 저장, 재구성보다는 인용을 중심으로 기능한다.

     

    수정 자체를 기록하는 시스템 구조와 투명성의 작동

    마지막으로 팔림프세스트가 발생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수정 자체가 은폐가 아닌 기록의 한 형태로 간주되는 인프라가 존재한다. 이는 투명성과 책임성이 중시되는 기록 시스템에서 두드러진다. 모든 수정이 자동 기록되거나 이력 관리가 가능한 시스템에서는, 과거를 지우기보다는 그 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기록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가 된다.

    이 구조는 과거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변화를 시각적으로 추적 가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기록 환경이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팔림프세스트의 필요성을 본질적으로 제거한다. 다시 말해, 변경의 이력 자체가 정보가 되는 시스템에서는, 삭제가 아니라 변화의 축적이 본질적인 기록 전략이 된다. 팔림프세스트와는 정반대의 철학이 이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팔림프세스트의 부재는 완성된 기록 구조의 또 다른 증거다

    팔림프세스트가 형성되지 않는 환경은 단순히 기록이 덧씌워지지 않아서 생긴 공백이 아니라, 기록의 생성과 수정, 보관, 활용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게 설계된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기록 매체의 풍족함, 기술적 복제의 가능성, 제도적 보존 윤리, 다매체 환경, 그리고 수정의 투명성 등 다양한 조건이 결합된 결과이며, 기록이 삭제보다 축적을 전제로 작동하는 환경에서만 가능한 구조다.

    팔림프세스트의 부재는 곧 ‘기록의 단순성’이 아니라, 기록의 완성된 설계 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과거를 지워야 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과거의 흔적이 시스템적으로 보존되어야 하는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팔림프세스트가 없는 곳을 기록의 흔적이 없는 공간으로 보는 것은 오해이며, 그보다 더 정교하게 기억의 층위를 설계하고 저장하는 능동적 기록 문화가 존재한다는 증거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