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12. 28.

    by. 팔림프세스트의 연구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과거의 텍스트를 지운 후 그 위에 새로운 내용을 덧씌운 문서 형태를 의미한다. 고대와 중세의 양피지 문서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 구조는 본래 기록 재료의 희소성과 경제적 이유로 비롯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시간의 흔적이 물리적으로 중첩된 독특한 텍스트 형태로 진화했다. 이때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기존 텍스트를 지우는 행위’ 자체가 완전한 삭제를 거의 실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기술은 일정 수준의 삭제를 가능케 했지만, 종종 지워진 흔적이 남았고 이는 이후의 해석자들에게 또 다른 의미 층위를 제공하게 되었다. 팔림프세스트의 존재는 곧 삭제의 불완전성, 더 나아가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의 공존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팔림프세스트에서 완전한 삭제가 왜 구조적으로, 물질적으로,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는지를 다각도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팔림프세스트의 매체 특성과 삭제 한계

    팔림프세스트가 형성된 매체, 즉 양피지(parchment)는 기록과 삭제의 특성이 밀접하게 얽혀 있는 물질이다. 양피지는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잉크가 표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섬유 조직 내부로 스며드는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속성은 문자를 적는 데에는 적합하지만, 나중에 이를 지우고 다른 내용을 다시 쓸 경우 잉크의 흔적이 표면 아래에 남는 구조를 만든다.

    삭제 방식으로는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내는 ‘스크레이핑(scraping)’이나, 젖은 천으로 문지르는 ‘워싱(washing)’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들 방식 모두 물리적 손상이나 잔존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는 기술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반복해서 삭제와 재기록이 이루어진 양피지의 경우, 표면의 내구성이 점차 약화되어 텍스트 흔적이 더 깊이 각인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곧 삭제가 반복될수록 오히려 이전 기록의 흔적이 더 명확하게 남는 ‘역설적 효과’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팔림프세스트는 그 자체로 물질이 지닌 복원성과 저항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텍스트 흔적의 저장 구조라고 볼 수 있다.

     

    당대 기술의 한계와 삭제의 불완전성

    기술적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및 중세의 필사 문화는 제한된 도구와 기술 환경 속에서 삭제와 재기록을 병행해야 했다. 기록을 지우는 데 사용된 칼날, 사포, 천 등은 비교적 단순한 도구였으며, 이로 인해 섬세하게 특정 텍스트만 지우고 표면을 완전히 정리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또한 당시에는 잉크의 성분도 일정하지 않았으며, 일부는 산화되거나 변색되어 오히려 시간이 흐른 뒤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자외선, 적외선, X선 촬영 등으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문자를 복원할 수 있지만, 이러한 기술이 없던 시기에는 삭제된 기록이 어떤 정도로 남아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다. 필사자는 오직 표면의 시각적 지표만을 보고 삭제 여부를 판단했으며, 이로 인해 겉보기에 지워졌지만 실제로는 지워지지 않은 텍스트가 다수 발생했다. 또한 표면이 고르지 않거나, 가죽의 상태가 균일하지 않은 경우, 잉크가 특정 부분에 더 깊게 남아 복원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흔적이 남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물리적, 기술적 제약은 완전 삭제가 기술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팔림프세스트에서 완전한 삭제가 거의 불가능한 이유

    삭제의 의도와 현실 사이의 간극

    팔림프세스트에서 삭제는 일반적으로 '기존 텍스트를 완전히 제거하여 새로운 내용을 온전히 기록하기 위한 과정'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사례들을 살펴보면, 삭제의 목적이 언제나 '완전한 말소'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실용적 필요에 따른 가시성 조절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즉, 새로 쓸 내용이 독해 가능할 정도로만 정리된다면, 과거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 상태도 허용 가능한 범주에 포함되었다. 이처럼 삭제의 기준은 기술적 완결성보다 기능적 실효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으며, 이는 당시 필사 관행의 문화적 실천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필사자들은 일정한 양의 문서를 정해진 시간 내에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삭제 작업은 시간과 노동력을 많이 요구하는 부담스러운 공정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정밀한 완전 삭제보다는 빠른 제거와 재기록의 효율성이 중시되었고, 그 결과 흔적이 남은 상태의 팔림프세스트가 흔히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기술의 한계를 넘어 당시 기록 환경이 요청한 작업 조건과 생산 효율이라는 현실적 요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 나아가 어떤 경우에는 삭제의 불완전성이 오히려 텍스트 생산의 의도 안에 내포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과거 텍스트와 새 텍스트가 주제적으로 크게 충돌하지 않거나, 혹은 과거 기록의 잔재가 새로운 기록의 의미를 강화하거나 보완하는 경우, 필사자는 의도적으로 삭제를 완전히 수행하지 않았을 수 있다. 이러한 의도적 비완전 삭제는 단지 시간 단축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텍스트 층위의 문화적 구성 요소로 기능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삭제의 불완전성은 이처럼 단순히 기술 부족이나 실수로 귀결되지 않는다. 삭제가 실패한 것인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인지를 구분하는 해석은 팔림프세스트를 단순한 문서 형태가 아니라 기록 생산의 복합적 실천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팔림프세스트의 삭제 흔적은 단순히 '남은 것'이 아니라, 의도와 조건, 맥락이 조율된 결과물로 보아야 하며, 삭제를 둘러싼 이러한 간극은 기록의 의미 해석에서 핵심적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삭제와 보존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텍스트의 중첩

    팔림프세스트에서 삭제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단지 물리적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불완전한 삭제는 기록의 이중 구조 또는 다층 구조를 형성하는 핵심 요인이 되며, 결과적으로 하나의 문서 안에 두 개 이상의 시간대, 의미 체계, 기록 목적이 공존하게 만든다. 이렇게 겹쳐진 텍스트는 단순히 ‘두 겹의 기록’이라는 물리적 상태를 넘어, 시간의 비선형성과 기억의 중첩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구조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고대 문서 해석뿐 아니라, 기록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인식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한 문서에서 후대 필사자가 쓴 중세 라틴어 주석 아래에 고대 그리스 철학 문헌이 남아 있는 경우, 단지 두 언어의 공존만이 아니라, 지식 체계의 변천과 권위의 이동, 텍스트의 권력 구조 등을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처럼 팔림프세스트의 흔적은 단순히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해석의 층위를 다면적으로 확장시키는 구성 요소로 작용한다.

    텍스트의 중첩은 또한 물리적인 겹침만이 아니라 해석적 층위의 중첩으로도 이어진다. 현대의 독자나 연구자는 이중적으로 존재하는 기록을 통해 과거와 현재, 삭제자와 기록자, 의미와 흔적 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존 기록이 정치적 혹은 종교적으로 금기시된 것이었다면, 삭제 후 덧씌워진 텍스트는 사회적 기억의 재구성 전략을 드러낸다. 반면, 삭제되지 않은 상태로 남은 텍스트는 그 자체로 저항의 흔적, 또는 잊히지 않은 지식의 잔여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텍스트의 중첩은 기록의 본질이 단선적이지 않으며, 삭제와 보존이 항상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복합적 실천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기록은 때로 지워지는 방식으로 보존되고, 남겨지는 방식으로 변형된다. 팔림프세스트는 이 양가적인 움직임이 동시에 작동하는 지점에서 생성되며, 이로 인해 단순한 사료를 넘어서는 기억 구조의 시각적 구현물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디지털 아카이빙 시대의 기록 중첩 구조나, 다층적 정보 관리 시스템의 기획에도 통찰을 제공하며, 팔림프세스트의 문화적 의미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다.

     

    팔림프세스트를 통해 보는 삭제의 불가능성

    팔림프세스트는 삭제와 재기록이 반복된 결과물로서, 우리가 흔히 ‘기록은 남는다’는 인식을 뛰어넘어,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구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적으로 삭제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이 남아 해석 가능한 텍스트로 복원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복원성은 기록의 물질적 특성, 삭제 도구의 한계, 필사자의 작업 방식, 삭제의 목적과 전략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구성된다. 결과적으로 팔림프세스트는 ‘삭제하려는 의지’와 ‘삭제되지 않는 현실’ 사이의 긴장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며, 이 긴장은 기록을 단순히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시간과 권력, 기술과 의미가 중첩된 텍스트 구조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삭제되지 않은 흔적이 말해주는 기록의 진실

    팔림프세스트에서 완전한 삭제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사실은 단지 기술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라는 행위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누적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물질의 특성, 도구의 한계, 실용적 목적, 문화적 판단이 결합된 삭제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흔적을 남긴 채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처럼 지워진 것과 남은 것이 하나의 표면에 공존하는 구조는, 기록을 ‘지우면 사라지는 것’으로 보지 않고, ‘지우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재인식하게 만든다. 팔림프세스트는 그 자체로 삭제의 불완전성을 증명하는 텍스트이며, 기록의 본질이 저장보다는 중첩과 전환, 기억과 망각 사이의 끊임없는 균형 조정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