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필기 도구·재료가 팔림프세스트 형성에 미친 영향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기존에 쓰인 기록을 지운 후 그 위에 새로운 내용을 덧썼다는 점에서 ‘기록의 반복’이라는 특징을 지닌 문서 형태다. 이 기록 구조는 단순히 반복된 텍스트가 아니라,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용된 잉크, 필기도구, 재료 등의 물질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팔림프세스트는 단순한 문헌이 아니라 물질의 흔적이 응축된 복합 구조인 셈이다. 그런데 기록의 물질적 구성 요소는 단지 ‘텍스트를 남기는 도구’가 아니라, 삭제 가능성과 흔적의 지속 여부, 겹쳐진 정보의 가시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팔림프세스트가 가능한 구조가 되었던 데에는 당대의 필사 기술과 함께, 잉크의 성분, 필기도구의 종류, 양피지나 종이의 특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글은 팔림프세스트 형성 과정에서 잉크, 필기도구, 기록 재료가 어떤 방식으로 개입했는지를 중심으로 그 물질적 기반을 분석한다.

 

잉크의 성분과 변성이 흔적의 지속성에 미친 영향

팔림프세스트 형성 과정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요소는 잉크의 물리·화학적 특성이다. 고대와 중세에 사용된 잉크는 일반적으로 탄소 기반 잉크(carbon ink), 철 갈로잉크(iron gall ink), 식물성 안료 잉크 등 다양한 성분으로 만들어졌다. 이 중 탄소 기반 잉크는 표면 위에 남는 성질을 갖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지우기 쉬운 반면, 철 갈로잉크는 표면 아래로 침투하여 섬유질을 변색시키는 특성이 있었다. 이러한 잉크는 시간이 지나면서 산화되거나 화학반응을 일으켜 종이나 양피지에 깊이 스며들었고, 물리적인 제거가 어려워졌다.

잉크의 변성은 기록의 삭제 가능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동일한 재료 위에 쓰였더라도 어떤 잉크를 사용했는지에 따라 흔적의 남음 정도가 달라졌고, 이는 팔림프세스트의 가시성과 해독 가능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철 갈로잉크는 오래될수록 더 어두워지거나 녹갈색으로 변하면서, 후대의 필사자들이 그 위에 새 텍스트를 쓰더라도 과거 기록이 시각적으로 겹쳐 보이는 현상을 유발했다. 따라서 잉크의 선택은 단지 문자의 가독성 문제가 아니라, 기록이 남을 것인지, 사라질 것인지에 대한 물질적 판단의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필기도구가 기록 흔적에 남긴 물리적 깊이

잉크와 더불어 필기도구도 팔림프세스트의 형성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필기도구는 당대의 제작 환경과 함께, 기록의 압력과 필선의 깊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양피지나 초기 종이에 글을 쓸 때에는 깃펜(quill), 금속 펜(metal nib), 혹은 뾰족한 갈대 펜 등이 사용되었다. 이들 도구는 잉크를 적셔 쓰는 방식으로, 필기자의 손 힘과 도구 끝의 구조에 따라 문자의 깊이나 굵기가 달라졌다.

특히 깃펜과 금속 펜은 종종 표면을 살짝 긁으며 글자를 새기기 때문에, 잉크가 사라지더라도 펜 끝의 자국이 물리적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이 흔적은 현대의 측광 장비나 고해상도 스캔 기술로 쉽게 복원되며, 텍스트가 지워졌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정보 자산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기록을 남긴 도구의 물리적 흔적이 삭제 이후에도 팔림프세스트의 하부 층위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록 도구가 남긴 깊이와 흔적은 단순히 텍스트의 외형이 아니라, 기억의 물질적 저장 방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기록 재료, 특히 양피지의 물질적 특성과 반복 사용성

팔림프세스트가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물리적 조건 중 하나는 바로 양피지의 재질이다. 양피지는 양, 염소, 송아지 등의 가죽을 가공하여 만든 고급 기록 재료로, 나무 펄프를 기반으로 하는 종이보다 훨씬 튼튼하고 탄력성이 높았다. 이로 인해 양피지는 반복적으로 문자를 새기거나 삭제하는 데 적합한 기반이 되었으며, 텍스트를 여러 차례 지우고 쓰는 반복 행위가 가능한 구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양피지 역시 완전무결한 재료는 아니었다. 표면의 두께나 섬유 밀도, 기름기 여부 등에 따라 잉크의 침투 깊이나 삭제 가능성이 크게 달라졌으며, 너무 많은 삭제가 반복될 경우 표면이 손상되거나 균열이 생기는 문제도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사자들은 표면을 긁거나 닦는 기술을 세밀하게 조정했으며, 때로는 부분적으로만 삭제하고 새롭게 기록하는 방식으로 타협하기도 했다. 이처럼 재료 자체가 제공하는 물리적 기반은 팔림프세스트의 유형, 기록의 중첩 가능성, 해석의 난이도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삭제 기술의 발전과 도구·재료 간의 상호작용

기록을 삭제하는 데 사용된 도구와 기술도 팔림프세스트 형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장 일반적인 삭제 방식은 날카로운 도구로 표면을 긁는 ‘스크레이핑(scraping)’과 젖은 천이나 해면으로 닦아내는 ‘워싱(washing)’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재료의 표면 상태, 잉크의 성분, 필기도구가 남긴 자국의 깊이 등에 따라 효과가 달라졌다.

예컨대, 표면이 매끄러운 양피지에는 워싱이 상대적으로 효과적이었지만, 섬유조직이 조밀한 재료에서는 스크레이핑이 더 선호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표면이 얇아지거나 미세한 균열이 생기면, 이후의 기록은 뚜렷하게 식별되면서도 이전 기록과 겹쳐 보이는 효과가 발생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팔림프세스트를 단순한 기록 교체가 아니라, 삭제와 기록이 혼재된 다층적 정보 구조로 만들었다. 이처럼 잉크, 도구, 재료, 삭제 기술 간의 상호작용은 기록의 중첩 구조를 물리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팔림프세스트의 잉크·도구·재료적 조건은 해석 구조를 바꾼다

현대 팔림프세스트 연구는 더 이상 단순히 오래된 문헌을 복원하는 기술적 행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디지털 인문학과 시각 복원 기술의 발전은 팔림프세스트에 대한 관점을 크게 바꾸어 놓았으며, 그 핵심에는 잉크의 잔류 성분, 필기도구가 남긴 압흔, 기록 재료의 반응성이 복합적으로 개입하는 ‘물질 조건’에 대한 해석적 관심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활용되는 복원 기술에는 자외선(UV), X선 투과, 적외선(IR), 다중 분광 촬영(Multispectral Imaging, MSI), 반사율 분석 등의 정밀 영상 처리 방식이 포함되며, 이 기술들은 단지 삭제된 기록을 시각적으로 되살리는 수준을 넘어, 기록층의 시간적 관계와 구조적 분포를 추적하는 분석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중 분광 촬영은 각기 다른 파장의 빛을 기록 재료에 투사하여 특정 잉크 성분이 반응하는 파장을 감지함으로써, 육안으로는 식별 불가능한 글자나 도형을 밝혀낸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잉크의 화학적 반응은 단지 ‘무엇이 쓰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떤 재료를 통해, 어떤 기술로 작성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동시에 제공한다. 특히, 잉크 성분이 서로 다를 경우 동일한 팔림프세스트에서도 층위마다 기록 시기의 차이나 필사자의 변화가 드러나는 등, 물질 분석은 텍스트 해석을 위한 결정적인 기반이 된다.

또한, 필기도구가 남긴 물리적 자국은 기록이 이미 지워졌더라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최근의 3D 표면 스캔 기술은 펜촉의 깊이와 각도, 손의 압력 등을 복원하여, 실제 필기 행위의 역동성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며, 이는 단순한 문자의 내용뿐 아니라 필사의 과정 자체를 해석 대상으로 확장시킨다. 이러한 기술들은 궁극적으로 팔림프세스트를 하나의 문서가 아닌, 다중적 층위를 가진 기록 구조체로 이해하게 만들며, 과거에는 ‘덧씌워진 흔적’으로 치부되던 내용들이 새로운 지식으로 복원되는 전환점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팔림프세스트의 해석은 이제 단일한 텍스트 분석에서 벗어나, 기술-도구-재료가 개입한 시간적 맥락 전체를 독해하는 복합적 작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기록을 단지 ‘남은 정보’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존재 방식을 구성하는 조건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게 만들며, 해석의 출발점을 기술적 사료에서 문화적 구조로 이동시키는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팔림프세스트의 물질적 구조는 기록 해석의 출발점이다

팔림프세스트는 흔히 ‘덧씌운 텍스트’ 또는 ‘지워진 기록’의 흔적 정도로 이해되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그 구조의 복잡성과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실제로 팔림프세스트는 단지 과거 기록을 삭제하고 새로운 텍스트를 입력한 결과물이 아니라, 잉크의 화학적 변화, 도구의 물리적 흔적, 기록 재료의 반응성 등 수많은 조건이 복합적으로 얽힌 물질 기반의 다층 구조다. 이때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구조가 텍스트의 시각적 겹침뿐만 아니라, 기억과 망각, 삭제와 보존, 의도와 우연이라는 복합적 사유의 층위를 물질 위에 가시화했다는 데 있다.

기록이 다시 쓰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흔적이 일정 부분 제거되어야 했고, 이 삭제 과정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남겨진 자국과 잔류 성분은 새로운 기록과 함께 물리적으로 겹쳐지며, 독자에게 텍스트의 다층성과 시간의 중첩성을 체감하게 만든다. 이때 각각의 기록 층은 단순히 시간 순서로만 분리되지 않으며, 때로는 의미적으로, 또는 권력적 맥락에서 서로를 보완하거나 충돌한다. 팔림프세스트의 물질 구조는 바로 이 겹침과 흔적의 공존을 매개하는 장치로서 기능하며, 해석자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단일한 서사가 아니라 지워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와, 그 위에 적힌 새로운 현재 사이의 긴장이다.

더 나아가, 팔림프세스트의 물질 구조는 해석 방식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그동안 문헌을 ‘완결된 텍스트’로 해석해 왔지만, 팔림프세스트는 텍스트가 형성 과정에서부터 지움과 덧씀, 흔적과 부재가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해석자는 단지 글자를 읽는 독자가 아니라, 기록의 조건을 되짚고, 삭제의 의도와 현실의 차이를 파악하며, 남겨진 흔적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의 참여자로 변모한다. 즉, 팔림프세스트는 해석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해석 행위 그 자체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구조물이다.

결론적으로 팔림프세스트는 고정된 정보의 저장소가 아니라, 시간·기술·도구·기억이 얽힌 해석의 장(場)이다. 그것은 사료인 동시에 유물이며, 텍스트인 동시에 텍스트가 형성된 환경 자체를 담고 있는 복합 구조이다. 따라서 팔림프세스트를 연구한다는 것은 과거의 문장을 읽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문장이 지워지고, 남고, 다시 쓰이게 된 물질적 이유와 문화적 선택을 함께 읽는 일이며, 기록을 해석하는 새로운 감각의 훈련이자 사유 방식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